2014년 4월 22일 화요일

인생에서 가장 실패하기 쉬운 인간형 ‘헛똑똑이’


인생에서 가장 실패하기 쉬운 인간형 ‘헛똑똑이’

 

세상에는 만나는 사람마다 아래위를 훑어보고, 상대하는 경우마다 잘잘못을 따지고, 스치는 사람마다 됨됨이를 저울질 하는 사람들이 있다. 계산하다 계산이 맞으면 킬킬 웃고, 계산하다 계산이 틀리면 따져야만 하고, 계산하다 수지가 맞으면 깔깔 웃고, 계산하다 손해가 나면 팔팔 뛰고, 계산해도 그저 그러면 시무룩하다. 이른바 자신의 얄팍한 지식과 학력을 믿고 남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헛똑똑이' 타입형 인간들이다. 학력은 있지만 소통능력, 일할 의욕과 학구열 등 삶에 대한 의욕이 낮은 ‘하류 인생’중에 많지만, 고학력층인 의사•변호사•교수 등 전문직(쉽게 표현해 다른 분야는 잘 모르는 사람들)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많다. 물론 가장 흔한 부류는 (사회의 바닥에서 경험한 것을 갖고 마치 자신이 굉장한 경험을 가진 양 착각하는) 3류 사업가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굳게 믿기 때문에 매사 따지기를 좋아하고, 어떤 이유에서든 못 따지는 사람들을 바보로 취급한다. 인터넷에서 악성 댓글은 언제나 평론가 행세를 하는 이들의 몫이다. 이들은 한시도 남을 비판하고 비교하는 것을 멈추지 않기 때문에 늘 속이 타고 애가 타고 골치가 아픈 일생을 보내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실패하기 쉽고 희생자로 전락하기 쉬운 유형도, 인생에서 대개 불안한 장년과 불행한 노후를 맞기 십상인 인간형도 대개 이런 타입의 인간들이다. 똑똑이와 학돌이는 스스로를 과신하는 까닭에 사기꾼들이 탐욕을 자극하면 쉽게 넘어가기 마련이다. 반면에 못난이, 미련이, 뺀질이와 한심이는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에 웬만한 유혹에도 잘 넘어가지 않는다.(솔깃한 투자제안이나 증권시장의 일시적인 호황에 홀려 어렵게 모은 돈을 쉽게 날리는 것도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다.)헛똑똑이의 가장 큰 문제는 상아탑을 나서면 학습을 거의 안 한다는 점이다. 알량한 지식이 오히려 학습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지만, 이들은 대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자기가 똑똑한 줄 착각하는 습성이 강한 특징이 있다.

 

문제는 아무런 객관적인 근거없이 그저 자기 자신을 ‘진짜 똑똑이'로 착각하는 바로 이런 '헛똑똑이'들이다. 현대는 분명 똑똑한 사람들(Smart People)의 시대다. 창의적인 사람들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자신을 팔아 순식간에 투자자들의 30억 달러를 모아 드림웍스사를 설립한 것처럼, 그들 스스로가 사업의 전부가 될 수 있는 시대다. 이른바 자기 자신이 사업의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시대라는 이야기다.

사실 우리주변에서도 아이디어와 실력만 있으면 투자자들은 얼마든지 있다. 돈이 넘쳐나는 상황인데도 투자자들이 없다는 것은 아이디어와 실력이 모자란다는 유력한 증거다.

 

 

Im KABBU. So-called Haphazard Thinker. My followers call me Schemeless Philosopher. Living in Heyri Art Valley, World Most Beautiful Village.


 

 

kabbu를 추억하며~!

2001년 조용히 은퇴하고, 2004 40대 후반의 나이에, kabbu는 세속의 모든 일에 넌더리가 난 까닭에 예술마을 헤이리의 품에 자신을 안겼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곳에서 나에게 허락된 후반기 남은 생을 조용히, 모든 근심을 털어내고 살리라. 운명이 허락한다면 나는 이 안식처, 천사가 준 행복한 은거지에서 삶을 마치리라. 자유와 평온과 여유로움에 이 은둔지를 바치리라.

죽음이여, 내게 오라! 나는 너를 사랑한다!” 고 외쳤던 kabbu, 그는 자신의 바람대로 어느 비바람 몹시 치던 날, 3층 서재에 앉은 채로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인으로 갔다.

그의 한 제자는 이렇게 평했다. 그는 무계획적인 철학자였지만 학문과 세속의 지혜를 결합시킨 최초의 인텔리겐치아였고, 언제나 남과 완전히 다르고 색다른 글을 쓰고 싶어했다." 오늘도 그의 묘비에는 kabbu주의자들의 추모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경계 없는 경계

파레르곤과 예술작품의 정체

거울 속의 거울 - 미장아빔의 구조

 

경계 없는 경계

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보자. 원의 정의는 “한 점으로부터 동일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이다. 하지만 이러한 개념적인 정의만을 가지고 원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기에, 원을 직접 그려보든가 원형의 어떤 사물을 보아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원을 직접 그리든 혹은 머릿속으로 원의 모양을 상상하든, 반드시 원의 윤곽선을 떠올려야 한다. 말하자면 원의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배경과 분리된 실제의 선이든 가상의 선이든 어떤 선을 그리거나 상상해야 한다. 여기서 아주 단순하지만 의외로 답하기 쉽지 않은 질문을 던져보자.

  과연 원의 테두리를 이루는 선은 원의 안쪽에 속할까, 바깥쪽에 속할까?

  이 대답이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유클리드 기하학과도 관련이 있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선을 점들의 집합으로 정의한다. 그런데 점은 위치를 나타낼 뿐 크기는 갖지 않는다. 따라서 선도 두께 혹은 굵기 없이 길이만 가진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의에 따르면 사실상 점이나 선은 전통적인 관점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크기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크기를 갖지 않는 선을 그리거나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가 머릿속으로 원을 그릴 때 배경과 분리된 원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어떠한 경계 혹은 테두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바로 이 경계가 원의 테두리를 이루는 선이 될 텐데 이 경계선은 원의 안쪽이나 바깥쪽 어느 곳에 속한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더욱이 유클리드 기하학을 염두에 둔다면 과연 원의 테두리는 존재하는 것인가 혹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경계선이 경계의 안쪽에 속하는지 바깥쪽에 속하는지 애매하다는 사실은 실생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운동 종목에 따라 선은 안으로도 바깥으로도 규정된다. 야구 경기에서 타자가 친 공이 1루로 향하는 선과 거의 평행으로 날아갔다. 수비수는 공이 선 바깥으로 나가 파울이 되리라 예상하고 공을 잡으려고 힘껏 몸을 날리지 않았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공은 끝내 선에 걸친 채 멈췄다. 이 경우 야구의 규칙에 따라 공은 살아 있는 것으로, 바깥으로 나가지 않은 것으로 간주된다. 농구의 경우는 이와 반대다. 현란한 드리블로 공을 몰고 가던 선수가 살짝 금을 밟았다. 물론 그의 발은 선을 완전히 벗어나지 않았고 선 안쪽에 걸쳐 있는 상태다. 하지만 금을 밟은 것을 목격한 심판은 곧장 호루라기를 불어 아웃을 선언하고 공격권을 상대편에게 넘긴다. 야구에서는 선을 경기장의 안쪽으로 간주하는 반면, 농구에서는 선을 바깥쪽으로 간주한다. 이렇듯 테두리 선은 그 자체로 안쪽도 바깥쪽도 아니며, 관습에 따라 안쪽으로도 혹은 바깥쪽으로도 간주될 수 있다. 말 그대로 그것은 경계le bord일 뿐이다. 이러한 경계는 안쪽에도 바깥쪽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실체가 있다고 할 수 없다. 마치 유클리드 기하학에서의 점이나 선처럼.

 

  그런데 여기서 생각을 좀 더 발전시켜보자. 만약 안과 밖을 나누는 경계 자체가 명확하게 존재하지 않는다면 안과 밖이라는 구분도 명확한 것일 수 있을까?

  논리적인 비약처럼 보이는 이 황당한 질문이 바로 데리다(프랑스 철학자, 1930~)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해체주의라고 일컫는 것들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가령 문학 비평의 경우 텍스트의 의미를 전통적으로 텍스트 내부로 간주된 글 자체에서 찾지 않는다. 음악의 경우에도 음악의 의미는 연주뿐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음악 외적으로 간주된 사운드 기기, 악기, 의상, 퍼포먼스 등으로 확장된다. 무용 역시 엄격한 제식 동작에서 벗어나 무용으로 간주되지 않던 일상적인 동작까지 유의미한 무용 동작으로 간주된다. 데리다 자신이 실험적으로 참여하기도 했으며, 해체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축의 경우에는 건축에서 기능적으로 무의미한 요소들은 완전히 배제한 근대적 기능주의에 대립해 무의미한 것으로 간주되었던 장식적 요소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기도 했다. 해체주의의 이 모든 경향은 의미와 무의미라는 전통적인 대립 구도를 허무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파레르곤과 예술작품의 정체

  독일의 초현실주의 조형미술가 한스 벨머Hans Bellmer, 1902~1975는 자신이 직접 제작한 구체球體 관절 인형을 모델로 사진을 찍었다. 그의 작품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근대의 시기에 이러한 작품을 만들었다면 공식적인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름다움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벨머와 같은 작품을 예술작품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곧 우리가 예술작품의 의미를 아름다움에서만 찾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예술작품이 반드시 아름다워야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과거에는 (물론 아름다움보다 숭고의 범주를 더 중요시하기도 했지만) 예술작품이 아름다움을 구현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이는 원시시대보다는 고대에, 중세시대보다는 근대에 더욱더 그랬다. 대부분의 근대 미학자들은 예술작품의 가장 본질적인 가치를 아름다움에서 찾으려 했으며, 예술작품의 근원이 되는 아름다움이 어디에 있는지를 밝혀내고자 했다.

  ‘아름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곧 ‘예술의 근본적인 가치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통하는 것이었다. 데리다는 『회화에서의 진리La Verite en peinture(1978)에서 이 문제를 다루면서 우리가 예술작품의 궁극적인 가치라고 믿는 아름다움의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탐구한다. 그는 예술작품과 관련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는 이 주제를 살피기 위해 예술작품이 하나의 텍스트로서 갖는 미학적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석한다. 데리다의 이러한 탐구 과정이 어떤 확고한 의미나 규정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보면 오해다. 오히려 그의 이러한 탐구는 전통적인 사고를 전복하는 것이다.

전통적인 근대 미학자들은 아름다움의 실체를 특정한 무엇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세월이 지나도 불변하는 영원한 아름다움은 분명히 있다고 믿었다. 가령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그림은 국경과 시대를 넘어 아름다운 예술작품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근대 미학을 대변하는 칸트는 다빈치의 그림처럼 절대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 있는 예술작품을 보고도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어떤 편견이나 사념에 지배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칸트는 우리의 마음이 이렇게 편견이나 사심에 지배되는 상태를 자유롭지 못한 상태로 보았다. 결국 뒤집어 말하자면, 사심을 버리고 관조적인 무관심Gleichgutigkeit의 상태, 즉 칸트가 말하는 모든 구속이 배제된 자유의 상태에서 예술작품을 볼 때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당연히 역사와 문화를 초월해서 정신적으로 자유의 상태만 유지한다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예술작품에서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의 실체는 어디에 있을까? 예를 들어, 다빈치의 유명한 그림 「모나리자Mona Lisa(1503~1506)를 보자. 루브르 미술관을 찾은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다른 모든 작품은 다 제쳐두고라도 반드시 보는 그림이 바로 「모나리자」다. 이 그림이 아름답다고 한다면 그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모나리자」를 불멸의 명화로 남게 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규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그림이 예술적 텍스트로서 갖는 범위는 분명하다. 「모나리자」의 예술적 가치는 다빈치가 그린 그림 안에 있다는 것이다. 가령 「모나리자」를 금박 액자에 표구하든 혹은 값싼 나무 액자에 표구하든 「모나리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액자가 아니라 액자 안에 있는 그림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이러한 액자 안에 있는 예술작품을 에르곤ergon이라고 한다면 액자 혹은 액자들은 예술작품의 주변적인 것에 불과한 파레르곤parergon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어로 에르곤은 작품을, 파레르곤은 작품의 밖에 작품과 나란히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예술작품의 본질이 에르곤이라면 파레르곤은 그저 일종의 장식I'omemant일 뿐이다. 장식은 예술작품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효율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굳이 ‘안팎’을 따지자면 파레르곤은 예술작품의 안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틀림없이 바깥에 속하는 것이다. 가령 그림의 틀이나 조각품의 휘장, 건물의 기둥 등은 예술작품의 주변적인 장식에 불과한 것이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닌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칸트를 포함한 전통적인 사상가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데리다는 예술작품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대표적인 근대 사상가인 칸트에게서 독특한 불일치가 발견된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가 보기에 칸트는 파레르곤을 비본질적인 것, 즉 예술작품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작품과 무관하지 않음을 은근히 인정하고 있다. 가령 그림의 틀은 그 자체로는 예술작품과 무관하지만 어떤 그림을 어떤 액자에 표구하느냐에 따라 그림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적절한 틀은 예술작품의 가치를 높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파레르곤이 작품과 완전히 무관한 것은 아닌 셈이다. 데리다는 이런 논의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파레르곤은 결코 예술작품의 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고 믿는다. 가령 똑같은 영화라고 하더라도 좋은 음향 시설과 조명 장치가 있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좋은 음향 시설과 조명 장치는 영화라는 텍스트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그 때문에 영화의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같은 음식이라도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맛 자체가 달라지는 것도 한 예다. 말하자면 파레르곤은 전통적인 기준에서 볼 때 분명히 텍스트 바깥에 있지만, 사실상 텍스트 의미를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으므로 결코 외적인 것이 아니다. 파레르곤은 그림의 액자틀처럼 텍스트 안팎의 경계를 가르는 ‘틀le cadre’이다. 그런데 ‘틀’ 자체는 정작 텍스트의 안과 밖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일종의 경계다. 데리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파레르곤은 에르곤, 즉 완성된 작품에 반대되며, 옆에 있으며, 동시에 부착되어 있지만 어느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어느 정도 떨어져 작품 구성에 관여하고 작품의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바깥도 아니고 안도 아닌 것, 경계의 변두리에서 맞대어 있을 때는 아주 유용한 나무로 된 장식품 같은 것, 이것은 무엇보다도 경계I'a-bord. 

- 『회화에서의 진리』

 

  말하자면 파레르곤은 예술작품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안과 밖을 구분 짓는 경계다. 원이나 사각형을 이루고 있는 경계선이 그 도형의 내부에 속하는지 바깥에 속하는지 결정할 수 없듯이 경계로서의 파레르곤 역시 그 성격을 결정지을 수 없다. 그렇다면 데리다가 이런 모순적이고 애매한 파레르곤의 성격에 굳이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데리다는 파레르곤이 예술작품의 안이나 밖에 속하지 않는 경계 자체임에 주목함으로써 오히려 예술작품 자체가 하나의 파레르곤으로써 안팎의 경계를 갖지 않는 모호한 성격을 지닌 것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실제로 신인상주의 화가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 1859~1891는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Un dimanche apres-midi a i'lle de la Grande Jatte(1884~1886)에서 그림의 틀 부분까지 색점을 찍음으로써 에르곤과 파레르곤 사이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다.

  만약 예술작품의 의미가 텍스트 내부에 있는 것도 아니고 텍스트 외부에 있는 것도 아니라면 당연히 그것들이 얽히는 중간에 있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술작품 자체는 텍스트의 안과 밖의 구분 자체가 허물어진 경계 자체일 뿐이다. 이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텍스트 속에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든지 가변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어떠한 고정된 의미라도 쉽사리 ‘해체’될 수 있는 것이다.

  데리다가 본 예술작품의 의미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어떤 틀 안에 있는 실체가 아니라 바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틀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거나 미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예술작품의 안과 밖 사이의 경계 자체이며, 이러한 경계가 곧 아름다움의 실체라는 것이다. 이 말을 뒤집으면 아름다움의 실체는 사실상 원의 테두리처럼 허구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이 실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단지 허구적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예술작품 안에 존재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바깥에 있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것이 아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데리다가 보기에, 아름다움을 작품의 틀 안에서 찾으려 했던 칸트의 미학에서도 이미 이러한 역설이 감지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칸트 자신의 미론이 이러한 역설에 바탕을 두고 있다. 칸트에게 예술이란 단지 우리의 감각을 충족시키는 데 불과한 것이 아니며, 아름다움도 그저 감각적으로 쾌적하다거나 만족스러운 경험이 아니다. 보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예술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고상한 이념을 눈에 보이는 형상으로 실현시키는 것이며, 우리가 느끼는 미감의 경험이란 그러한 이념을 심미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칸트에 따르면 결국 아름다움이란 눈에 보이지 않는 이념이 눈에 보이는 감각적 형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 말을 좀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칸트가 『판단력비판』에서 들고 있는 미의 규정에 대한 네 가지 계기를 알 필요가 있다. 이 네 가지 계기란 무관심성Gleichgultigkeit, 보편성Aligemeinheit, 합목적성Zweckmabigkeit, 필연성Notwendigkeit이다. 이 중에서 데리다가 주목하는 것이 세 번째 규정인 합목적성이다.

  칸트가 합목적성을 미의 필수불가결한 계기로 간주한 이유는 이렇다. 만약 어떤 대상에 형식적인 조화나 균형이 없다면 우리는 그 대상에 미감을 느낄 리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곧 우리가 어떤 질서나 규칙 혹은 조화가 전혀 없는 상태를 경험할 때는 아름답다고 느낄 가능성이 없다는 말이며, 반대로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경우 그 속에는 적어도 어떤 형식적인 조화나 균형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가 보기에 이는 곧 대상이 ‘합목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대상을 볼 때는 아름답다고 하면서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고 여긴다면 아름다움을 느끼는 대상이 어떤 합목적적인 질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합목적성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목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선험적 규정에 따라 정의하자면, 목적이란 어떤 대상의 원인이 되는 개념이다. 즉 그 대상의 존재 이유다. 그리고 이 개념이 대상과 갖는 인과적 관계가 바로 합목적성인 것이다. 

- 『판단력비판』

 

  한마디로, 합목적성이란 어떤 대상이 특정한 목적을 가지는 성질을 말한다. 가령 어떤 고고학자가 신석기시대의 집터를 발견했다고 해보자. 그가 집터를 발견한 근거는 무엇일까? 당연히 지질을 탐사하다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 땅의 형태를 발견한 것이다. 말하자면 그냥 아무런 목적성도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성을 지니고 있는 형체, 즉 합목적성이 있는 어떤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렇게 어떤 것이 완전히 무작위적이거나 혼돈스럽지 않고 나름대로 규칙성이나 목적성을 갖췄을 때 그것을 합목적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따라서 합목적성의 핵심은 바로 목적이다.

  예를 들면, 비행기의 날개는 날기 위한 비행기의 목적으로 볼 때 합목적성을 지닌다. 책상에 붙은 네 개의 다리 역시 책상 상판을 지탱하기 위한 목적과 관련해볼 때 합목적적인 것이다. 따라서 합목적성이란 항상 어떤 목적을 전제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칸트는 여기서 재미있는 지적을 한다. 미적 대상은 합목적성은 지니되 결코 현실적인 목적이 전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적 대상이 현실적인 목적을 전제로 할 때 그것은 미적 규정의 첫 번째 계기인 ‘무관심성’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화려한 요리를 보고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해보자. 요리가 인간의 미각을 위한 것이라는 현실적 목적(혹은 관심) 때문이라면 결코 그런 미감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빨리 먹어치우고 싶은 생각만 들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미감과 무관하다. 미감은 오히려 요리의 현실적 목적을 무시할 때 생기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상을 사심 없이 관조할 때 미감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칸트는 미적 쾌감은 무관심으로부터 발생한다는 근대 경험론 미학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칸트는 미적 대상이란 합목적성은 있되 실제로 목적은 없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래서 그는 미감을 발생시키는 미적 합목적성이란 곧 ‘목적 없는 합목적성Zweckmabigkeit ohne Zweck’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만들어낸다. 또 칸트는 이런 합목적성은 실재적인 목적을 전제하지 않기 때문에 다만 ‘주관적인 합목적성die subjektive ZweckmaBigkeit’에 불과한 것이라고도 정의한다. 하지만 과연 목적이 없이 합목적성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합목적성이라는 개념의 정의 자체가 이미 목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말은 논리적인 모순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목적을 전제할 경우에 무관심성에 위배되므로 또 모순에 빠지고 만다. 결국 어느 쪽도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칸트는 이와 같은 모순을 피하기 위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는 모순적인 개념을 설정하고 그것을 정당화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보자면 칸트는 미학은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지금까지 데리다의 주장이 맞는다면, 당연히 칸트의 미학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데리다가 보기에 칸트의 이러한 모순은 칸트 미학의 약점이 아니다. 오히려 칸트는 자신도 모르게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움에 관한 칸트의 이론이 갖는 미덕은 칸트의 아름다움이 모순에 빠졌다는 사실 그 자체다. 데리다가 보기에 칸트의 이론은 틀린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의 의미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칸트의 이론이 모순에 빠진 것은 칸트가 예술작품의 본질에 다가섰다는 징후다.

 

  데리다는 칸트가 이러한 역설의 본질에 다가섰음을 ‘목적 없는ohne Zweck 합목적성’의 정의에서 ‘없는’이라는 말에서 찾아낸다. 이때 ‘없는’에 해당하는 ‘ohne’라는 독일어 전치사는 말 그대로 없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목적 ‘없는’ 합목적성이라고 했을 때 실제로 목적이 없다면 합목적성이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 ‘없는’이라는 말은 ‘없음’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있을 수밖에 없음’을 나타내기도 한다. 목적이 없다면 합목적성도 없겠지만, 또 한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무관심성과 어긋나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데라다는 이 심각한 문제를 일종의 말놀이를 통해 접근한다. 전치사 ‘ohne’는 프랑스어에서 전치사 ‘sans’에 해당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sans’이 ‘의미’를 뜻하는 명사 ‘sens’과 동일하게 ‘상’으로 발음된다는 점이다. 기묘하게도 ‘없는sans’이 ‘의미sens’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작품의 의미sens가 바로 ‘없는sans’이란 단어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전부가 아니다. 데리다는 ‘없는sans’과 ‘의미sens’의 연관관계를 확실하게 규명하기 위해 또 다른 항을 개입시킨다. 그 다른 항이란 두 단어와 역시 발음이 동일한 프랑스어 ‘sang’이다. sang’은 ‘피’를 뜻하는 명사다. 이 세 단어는 프랑스어로 모두 ‘상’으로 발음된다. 이 세 단어가 어떤 논리적인 연관성 때문에 동일하게 발음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우연의 일치로 동일한 발음을 갖게 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데리다는 바로 이러한 우연의 일치에서 놀이를 발견한다.

  그는 ‘피sang’는 피부의 ‘절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 착안해, 의미는 바로 이렇게 피를 부르는 절단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이때 절단이라는 것은 다분히 은유적인 표현으로, 안과 밖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자르는 행위를 상징한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절단은 ‘틀’과도 관계있다. 왜냐하면 틀이야말로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데리다는 안팎을 엄격하게 구분해 예술작품의 안쪽에 어떤 불변적인 의미가 보존되어 있으리라 생각하는 것은 피를 부르는 서구 사상의 폭력과도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예술작품의 ‘의미sens’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모순으로서 ‘없는sans’ 것이며, 안과 밖을 엄격하게 구분해 의미를 가두려 할 경우 ‘피sang’를 부르는 폭력적인 것이 되고 만다.

 

거울 속의 거울 - 미장아빔의 구조

  일본의 곤 사토시 감독의 만화영화 「천년여우千年女優(2001)는 매우 독특한 이야기 구조를 지닌다. 영화는 전설적인 여배우 후지와라 지요코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영화사 간부인 다치바나 겐야가 그 여배우를 만나러 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요코는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일본의 영화계를 주름잡은 배우였지만 한창 인기를 누리던 30년 전 갑자기 영화계에서 사라져버린다. 겐야는 어렵게 지요코를 찾아냈지만, 세상과 완전히 등진 그녀가 쉽게 인터뷰에 응하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겐야가 지요코 앞에 오래된 열쇠 한 자루를 내놓으면서 극적으로 인터뷰에 성공하게 된다. 그 열쇠는 지요코가 평생 사랑했던 한 남자가 그녀에게 준 유일한 물건으로, 그녀를 배우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생을 여기까지 끌고 온, 말 그대로 지요코 인생의 수수께기를 풀 수 있는 열쇠이기도 했다.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 지요코는 경찰에 쫓기고 있던 한 남자를 만난다. 일본의 전쟁에 반대하는 반정부주의 화가였던 그에게 어린 지요코는 사랑을 느낀다. 진정한 평화의 시기가 오면 자기가 태어난 고향의 밤하늘을 보여주겠다던 그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여는’ 열쇠만을 남긴 채 경찰에 쫓겨 사라진다.

  얼마 후 지요코는 우연히 만주에서 촬영 예정인 영화의 출연 제의를 받게 되는데, 그 남자가 만주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오로지 그 남자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만으로 영화 출연 제의를 수락한다. 이때부터 지요코의 영화 인생이 시작된다. 그녀는 센고쿠 시대(1467~1573, 일본의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무사를 사랑하는 여인으로, 에도 시대(1603~1867)가 배경인 영화에서는 반역죄인을 사랑하는 여인으로, 1930년대 말을 배경으로 한 영화에선 민권 운동가를 사랑하는 여인으로 출연한다.

  「천년여우」라는 제목처럼 지요코는 센고쿠 시대부터 미래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에서 1.000년 동안의 시대를 거치지만, 그 영화들의 내용은 지요코의 실제 삶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가 일생 동안 찾아 나선 그 화가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녀가 출연하는 영화를 통해서도 항상 반복된다. 영화 속에서 지요코의 사랑은 그녀의 실제 삶과 마찬가지로 항상 이루어지지 못한다. 지요코가 출연하는 영화에서의 삶과 그녀의 삶이 중첩되는 것이다.

  「천년여우」는 이른바 ‘액자영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액자영화란 액자소설에서 유래한 것이다. 즉 소설 속에 소설이 존재하는 형식인 액자소설과 마찬가지로, 액자영화는 영화 속에 또 하나의 영화 혹은 연극이 존재한다. 셰익스피어가 「로미오와 줄리엣」(1597)을 쓰게 된 과정을 가상으로 그린 영화 「셰익스피어 인 러브」(1998)는 영화 속에 연극이 등장한다. 비록 역사적 사실이 아닌 허구에 바탕을 둔 이야기지만, 이 영화에서 셰익스피어는 귀족 바이올라와 사랑을 하게 되는데 그 자신의 비극적 사랑이 영화 속에서 시나리오상 전개되는 연극(혹은 영화)은 결코 영화의 내용과 동떨어지거나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액자영화의 전형으로 간주될 수 있다.

  「천년여우」를 보는 관객들은 영화에 등장하는 지요코와 영화의 시나리오 상 전개되는 영화 속 영화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지요코 중 어느 것이 진짜 지요코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심지어 지요코가 실제로 사랑하는 화가를 쫓아 나서는 장면과 영화 속 영화의 지요코는 내용상 서로 중첩된다. 게다가 지요코를 인터뷰하는 겐야는 엉뚱하게도 지요코가 등장하는 영화의 위기 장면에서 불쑥 나타난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뒤죽박죽 얽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액자영화로서 「천년여우」의 묘미는 시간과 공간의 뒤범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갖는 스토리의 구조를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는 데 있다. 영화의 스토리와 영화 속 영화의 스토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 같은 구조를 갖기 때문이다. 「천년여우」의 경우만 보더라도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구조를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영화상에서 실제 지요코의 삶은 한 남자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사랑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으로 일관한다. 그런데 영화 속의 영화, 즉 지요코가 출연하는 영화의 내용들은 모두 지요코의 실제 삶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영화 속의 영화라는 공간과 스토리는 이미 지요코의 실제 삶의 공간과 스토리를 설명하는 것만으로 의미를 지닌다. 이렇게 영화 속 영화의 내용이나 의미는 영화의 실제 스토리를 비추는 거울이다.

  그렇다면 영화 속 영화는 영화의 실제 공간과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적인 공간과 스토리일까?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영화 전체로 놓고 보면 거꾸로 해석될 수도 있다. 즉 지요코가 실제 겪는 삶의 과정들은 오히려 영화 속 영화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만약 지요코의 삶이 한 남자에 대한 이루지 못할 사랑을 찾기 위한 무모한 과정으로 그려지지 않았다면, 지요코가 출연하는 영화 속 영화의 줄거리나 설정은 영화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즉 영화에서 실제 지요코의 삶은 거꾸로 영화 속의 영화가 의미를 지니기 위한 장치로서 기능한다. 액자영화나 액자소설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영화 속 영화, 혹은 소설 속 소설이 갖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는 점이다. 작품의 내용과 관련 없는 영화 속 영화나 소설 속 소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액자영화에서는 본래부터 영화 속 영화가 영화 자체의 스토리에 절대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액자영화는 정확하게 영화에서의 실제 공간과 영화 속 영화에서 벌어지는 공간이 서로 반영하는 구조를 갖는다. 이를 비유적으로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그 엘리베이터의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두 면에 거울이 달려 있다고 생각해보자. 즉 우리가 서로 마주 보는 두 개의 거울 사이에 서 있는 것이다. 이때 재미있는 현상이 나타난다. 둘 중의 어느 한쪽 거울만 보아도 그 거울을 보고 있는 나의 모습만 비치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도 비치며, 또 내가 눈 앞의 거울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비친 반대편 거울의 상이 다시 내 눈앞의 거울에 비치는 등의 현상이 수없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그 거울 속에 나타난 내 모습은 무한 개일 것이므로 세는 것이 불가능하다. 말하자면 거울은 무한한 깊이를 지니고 무한한 상을 담는 심연의 공간, 즉 미장아빔의 구조다.

  그런데 재미있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수없이 많이 비친 상 중에서 어느 것이 나의 원본이고 복사본인가? 바로 눈앞 거울에 가장 크게 비친 내 이미지를 원본으로 봐야 할까? 사실 이런 구분은 무의미하다. 거울에 직접 비친 나의 상이나 반대편 거울에 비친 상, 또는 그 상이 다시 이쪽 거울에 비친 상들 중에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리는 것은 이미 무의미하다. 말하자면 진짜라고 믿는 것의 의미는 이미 실종되고 만다.

  이러한 구조는 「천년여우」의 지요코의 삶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지요코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인 남자를 찾아 헤매지만 사실 그 남자는 이미 죽은 지 오래다. 지요코의 삶이 추구하는 대상 자체가 이미 없는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지요코는 그다지 충격을 받지 않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사랑한 것은 그 남자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죠. 내가 진정 원한 것은 한 남자를 사랑하는 내 자신의 모습이었을지도 몰라요.

지요코에게 그 남자의 실상은 어쩌면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그 남자는 이 영화에서 지요코의 삶을 이끌어 가는 장본인이란 점에서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남자 자체가 어떤 남자인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 남자는 어떤 특정한 내용을 갖는 기호가 아니다. 그저 지요코의 절대적인 욕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텅 빈 기호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고 기호라고 보는 모든 것들이 이렇게 뻥 뚫린 것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기호란 원래부터 공허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데리다가 기호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기호의 의미는 지요코의 욕망이 채우고 있을 따름이다. 데리다는 이렇게 「천년여우」와 같은 미장아빔의 구조가 텅 빈 기호의 특성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미술 이론가 로절린드 크라우스Rosalind Krauss, 1941~는 데리다가 생각하는 미장아빔의 구조가 현대 예술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고 보았다. 크라우스에 따르면 현대 예술작품은 기호학적으로 ‘전환사shifter’의 특성을 가진다. 전환사란 ‘이것’, ‘지금’, ‘여기’와 같이 하나의 특정한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은 지칭사deixis를 뜻한다. 이것, 지금, 여기와 같은 전환사를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혹은 맥락에 따라 지칭하는 대상이 항상 변할 수 있다. 이는 전환사가 특정한 의미를 담지 않는 비어 있는 기호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크라우스는 20세기 이후 현대 미술의 작품들이 전환사의 특성을 띤다고 보았다. 현대 미술의 작품들은 미리 정해진 기호가 아니라 비어 있는 기호로서 맥락에 따라 항상 변화하며, 아예 무의미한 것이기도 하다.

  데리다가 예술작품의 근원적인 의미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렇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파레르곤처럼 무의미와 의미의 중첩이며, 어떠한 확고한 경계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